

필살기라고 하긴 좀 그런, 멸이라는 게 있긴 하다. 히아센 너의 꿈 속, 나의 그림자 속. 그곳에 가지고 들어간 생명, 물건. 그 무언가를 언제 어떻게 했는지, 어디에 두었는지, 존재 자체를 완전히 망각하게 하는 것.
왜 갑자기 단장님께서 해 주신 말이 기억이 났을까. 알 수 없는 감정이 머리 꼭대기까지 몰아쳐서일까. 대상 없는 분노가 결국 나에게 날아와서일까. 이런 감정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곪아갈 거면 차라리 잊어버리는 게 나으니까. 감추어진 선배의 진실된 존재도, 선배가 준 실로폰채도, 그 날의 기억도,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 응어리진 그 감정도, 전부 다. 단장님께서 말해주신 것처럼, 차라리 망각해버리는 게 나을 테니까. 히아센이 나즉히 한숨을 내뱉었다. 체르타의 질문에 대답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기도 했지만, 물어보지 않았어도 제 스스로 뱉었을 고민이렷다. 히아센이 체르타의 시선을 마주하다, 곧이어 천천히 제 입술을 떨어트렸다.
“대상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멸 연습이 가능하죠?”
“그렇기야 한데…….”
공격적이야, 너. 체르타의 말에 히아센이 제 어깨를 까닥였다. 멸하고 나면 잊어버리잖아요. 상관없어요. 입술이 움직임과 동시에, 히아센이 제 눈을 가늘게 떨어트렸다. 어쩐지 체르타를 바라보는 두 눈동자에는 허탈함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잊어버리는 것만큼 편한 것이 없다고 하셨죠. 하는 법 가르쳐주세요. 존재 자체를 잊게 되는 거니까, 이걸 받을 당시에 느낀 제 기분도 같이 없어지겠네요.”
알고 싶지 않았던 감정 따위는, 차라리 잊어버리는 게 편할 테니까. 히아센이 고개를 떨구었다. 가볍게 품속에 쥔 실로폰채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위태롭게 굴었다.
“어떤 건지 진지하게 알고 싶어졌어요. 멸해서 신경쓰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요. 알려주세요, 멸.”
이내 크게 숨을 들이마신 히아센이 제 황색 눈동자를 굴려 체르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응하기라도 하듯 가늘게 떨어트린 눈동자로 히아센을 바라본 체르타가 제 눈썹을 까닥였다.
곧이어 히아센을 바라보고만 있던 체르타가 느릿하니 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느린 걸음걸이와 알 수 없는 이동방향이 거슬리기라도 한듯 히아센이 어디를 가느냐며 체르타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체르타의 시선이 히아센에게 머물렀다가 이내 자신이 걷던 다시 방향으로 굴러간다. 도대체 뭐를 하시려고 하길래 그러시는 건지. 자신의 말에 답을 해주지 않고 다시 한번 발을 내딛은 체르타의 목적이 궁금했던 건지, 히아센이 까치발을 들고 체르타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런 히아센의 모습을 보며 체르타가 나즉한 웃음을 내뱉었다.
“나는 너의 전부를 알지 못하니 그 실로폰채가 너에게 무슨 감정을 가져다 주었는지 몰라. 그래서 그 실로폰채를 멸하기를 추천할 수도, 추천하지 않을 수도 없구나. 그러나 내게 멸을 배운다고 한 아이가 있다면, 그러니까 굳이 지명하자면 히아센 너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다.”
“단장님이 저에게 부탁하실 일이 있다고요?”
“그래. 네가 멸해주었으면 한 게 있어.”